제약산업은 연구개발로 성장하지만, 위기는 공급망에서 시작된다. 팬데믹 이후 전 세계 제약시장에 불어닥친 원료의약품(API) 공급 차질, 물류비 급등, 그리고 지정학적 리스크는 산업의 체질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지금, 한국 제약산업 역시 이 구조적 불안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 제약사의 원료의약품 자급률은 30%에 불과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올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서 사용하는 원료의 70%가 수입산이며, 그중 절반 이상이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원료의 대부분이 특정 국가에 집중된 상황에서, 중국의 환경 규제 강화나 수출 통제, 혹은 예상치 못한 물류 지연이 발생하면 한국의 의약품 생산은 순식간에 차질을 빚게 된다. 단순한 ‘공급 불안’이 아니라, 국민 건강과 직결된 ‘안전 리스크’다.
올해 상반기만 해도 그 징후는 곳곳에서 드러났다. 일부 항생제, 해열제, 수액류 품목이 품귀 현상을 겪으며 약국 현장에서 대체약 안내문이 붙었다. 제약업계는 원료 확보를 위해 급히 해외 물량을 사들였지만, 환율 상승과 해상운임 인상으로 제조원가가 높아졌다. 그러나 정부의 약가 통제 정책 속에 생산단가 상승분을 반영하기 어려워, 중소 제약사는 생산을 중단하거나 품목을 줄이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이 문제는 단순히 ‘공급 불안’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제약산업의 구조적 약점을 드러낸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약개발과 R&D 투자 중심의 성장 전략에 집중해 왔다. 그러나 ‘만드는 힘’, 즉 제조와 원료 확보 능력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졌다. 연구개발에 앞서 안정적 생산이 가능해야 신약도 시장에서 생명력을 가진다. 하지만 한국의 제약 공급망은 이 기본 토대가 취약하다.
정부도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식약처는 ‘국가 필수의약품 공급 안정화 대책’을 통해 원료의약품 생산 기반을 강화하고, 민관 합동으로 ‘국가필수의약품센터’를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국가 첨단전략산업’에 제약·바이오를 포함시켜 세제 혜택과 R&D 지원을 늘렸다. 그러나 여전히 정책의 무게중심은 ‘개발’에 있고, ‘생산과 공급’은 후순위에 머물러 있다.
해외 사례를 보면 해법은 분명하다. 미국은 팬데믹 직후부터 ‘바이오 제조 이니셔티브’를 통해 자국 내 원료 생산 비중을 높이고, 국방물자생산법(DPA)을 발동해 필수 의약품의 생산 라인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의약품 공급망 복원력 강화 전략’을 발표해 회원국 간 공공 비축과 공동 구매 시스템을 도입했다. 한국도 이제는 이런 거시적 시각으로 공급망을 다뤄야 한다.
국내 제약업계가 당면한 과제는 세 가지다.
첫째, 원료 국산화의 현실화다. 정부가 수년째 강조해온 원료의약품 국산화 정책은 아직 체감 성과가 부족하다. 단순히 ‘국산화율 목표’가 아니라, 산업 인프라와 품질 인증체계가 함께 구축되어야 한다. API 생산을 위한 중간원료 공정시설, GMP(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 인증 공장 확충 등 물리적 기반이 절실하다.
둘째, 국가 의약품 비축 시스템의 실효성 확보다. 현재 비축 대상 품목이 제한적이고, 저장 기간 및 재고 회전율 관리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단순히 물량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위기 발생 시 즉각 유통 가능한 순환형 재고 관리 시스템이 필요하다.
셋째, 약가 정책의 유연성 확보다. 정부는 재정 절감을 이유로 약가 인하 정책을 지속하고 있지만, 공급망 불안이 심화되는 상황에서는 현실적 대응이 어렵다. 필수의약품이나 수입 의존도가 높은 품목의 경우, 일정 수준의 원가 보전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들이 안정적 생산을 지속할 수 있다.
이제 제약산업의 경쟁력은 ‘누가 더 많은 신약을 개발하느냐’보다, ‘누가 위기 속에서도 약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로 판가름 날 것이다. 공급망이 무너지면, R&D 성과도 시장에 도달할 수 없다. 제약기업은 연구개발만큼이나 ‘위기 대응형 생산 구조’를 갖춰야 하며, 정부는 공급망 관리 체계를 ‘보건안보 인프라’로 인식해야 한다.
한국 제약산업은 지금 중요한 분기점에 서 있다. 신약개발 역량은 분명 높아졌지만, 산업의 뿌리인 생산 기반은 여전히 취약하다. 공장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공급의 생명선’을 튼튼히 잇는 일이 중요하다. 제약산업은 단순한 경제 산업이 아니다. 국민 건강을 지키는 생명산업이다. 불안한 공급망 위에서 혁신은 오래 설 수 없다. 이제는 연구개발보다 ‘공급의 안정성’을 새로운 경쟁력으로 키워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