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82년생 김지영'은 여성만의 영화가 아니었다
상영관서 男 관객도 상당수...'여성인권 신장'에 남녀 따로 없어 공감대 형성 영향
[핀포인트뉴스=홍미경 기자]
"우리사회는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어요. (여성들에게) 괜스레 미안하기도 하고..."
4일 오후 서울 가산동 롯데시네마 1관 퇴출구. 막 영화를 감상하고 나온 직장인 조영빈(38·남) 씨는 상영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눈시울을 붉혔다. 슬픈 멜로 영화를 볼 때에도 좀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던 그였지만 이번 영화는 달랐다. 자신의 어머니가 들려 준 여성들의 비극적인 삶이 장면 곳곳에 담겨 있었다.
조씨의 한 손에 들린 홍보 포스터는 그가 보고 온 영화를 짐작케 했다. '82년생 김지영'이다. 그는 "티켓을 예매할 당시엔 '페미니즘의 상징물'과도 같은 인식이 있어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었다"면서도 "가장 친한 동성친구가 관람하는 것을 추천해 보게 됐다. 그간 몰랐던 우리 사회의 다른 측면을 알게 해줘서 고맙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82년생 김지영', 논란의 시작
영화 '82년생 김지영(감독 김도영)'은 상영 초기만 해도 각종 논란에 휩싸였던 작품이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기반을 둔 탓인데 이 소설은 ▲소설임에도 통계를 인용한 점 ▲인용 통계자료의 모순(노동직군·근무시간 미고려) ▲60~70년대 일을 최근 일처럼 서술한 것 등을 이유로 많은 남성들의 비판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 5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자, '페미니즘(여성 권리와 주체성을 확장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이론 및 운동)'이 짙은 일부 여성들이 2~3회 시청을 거듭하며 관람객수를 높이고 있다는 주장이 빗발쳤다. 남성들의 관람율이 저조하기 때문에 이러한 전제조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성과라는 것.
실제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네티즌 평점(8일 기준)을 살펴보면, 남성이 2.21점, 여성 9.50점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장종화(前 국회의원·남) 더불어민주당 청년대변인은 지난 31일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남성을 역차별하고 있다'는 취지의 논평을 내기도 했다.
계속되는 논란 속에서도 100만 관객 돌파에 성공한 영화 '82년생 김지영'. 일각의 주장처럼 여성 중심의 관람이 이뤄지고 있는 것일까. 82년생 김지영의 입장이 시작되는 4관으로 향했다.
입장 대기줄 채운 男 관객들
"4관 8시 82년생 김지영 입장하실게요."
오후 8시께, 영화관 직원의 외침에 의외의 상황이 펼쳐진다. 중앙 로비 의자에 앉아있던 수십 여명의 남성 방문객들이 자신의 짐을 챙기며 입장 채비를 한다. 남성 관람객들로 길게 늘어선 입장 대기줄은 '여성 중심의 시청이 이뤄지고 있다'는 일각의 주장을 무색하게 했다.
남성 방문객들의 시청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가족·친구 등 주변 지인의 추천으로 왔다는 관람객이 있는가 하면, 여성들이 말하는 성차별적 요소가 무엇인지 몸소 느끼고자 왔다는 남성도 있을 정도다.
서울 구로구에서 방문한 퇴직인 김춘식(67) 씨는 "최근 아내과 명절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크게 다툰 적 있다. 여성들이 명절상 차리는 것을 힘들어 한다는 말에 남성도 장거리 운전과 차례를 진행하는 부분이라며 서로 언성을 높였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문뜩 나 자신이 옛 사고 방식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마침 여성들의 노고를 담은 영화가 개봉했다기에 아들과 보러 왔다. 우리(남성)가 자연스레 넘겼던 부분들이 문제의 소지가 있다면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2회차 관람하고 있다는 남성 방문객도 눈길을 끈다. 사내 젊은 직원들로부터 '꼰대(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어른)'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김무한(44) 씨다.
그는 얼마 전, 여성 직원 아무개씨에게 커피를 타 달라고 부탁했다가 직장 대표실에 불려간 적 있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여성에게 그런 부탁을 하느냐"며 호된 꾸중을 들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김씨는 "자신을 바꾸려면 열린 마음으로 그들의 고충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지난 번의 시청으로는 미쳐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재차 발걸음 했다"고 말했다.
홍미경 기자 blish@thekp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