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규의 雜說] 이름으로 본 대한민국 제약사의 역사, 130년의 철학
한국 제약산업의 역사는 곧 이름의 역사다. 이름은 단순한 상호가 아니다. 한 시대의 가치관과 산업 구조, 그리고 기업이 세상에 전하고자 한 철학이 녹아 있는 언어다.
1897년 동화약품의 출범으로 시작된 한국 제약의 여정은 창업자의 이름에서 철학 중심의 이념형 네이밍으로, 그리고 글로벌 시대의 기술 중심 영어식 이름으로 흘러왔다. 이름의 변화는 곧 산업의 진화와도 닮아 있다.
가장 오래된 제약사 동화약품은 이름부터가 상징적이다. ‘동방의 밝은 빛’이라는 뜻을 가진 동화는 조선 말기 근대 의약의 시작을 알렸다. 활명수라는 이름 역시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의미를 담아 의학의 근본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했다.
이후 등장한 유한양행은 창립자 유일한 박사의 이름에서 따온 ‘유한’과 무역을 뜻하는 ‘양행’을 결합했다. 정직과 신뢰를 기업의 기본 원칙으로 삼겠다는 선언이었다. 종근당 또한 창업자 이종근의 이름에서 비롯된 회사다. ‘근면·성실·책임’이라는 가치가 그대로 담긴 이름은 지금도 전통적 제약사의 모범으로 거론된다.
1950년대 이후 산업화의 흐름 속에서 제약사들은 이름에 지역과 철학을 함께 담기 시작했다.
보령제약은 창립지 보령의 이름을 사용했다. 창립자 김승호는 “기업은 고향의 이름으로 남아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향과 함께 성장하는 기업’을 상징한다. 지금도 ‘지역 기반 제약사’의 대표적 모델로 꼽힌다.
동아제약은 ‘동양의 밝은 빛’이라는 뜻으로 아시아 의약을 대표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으며, 국민 브랜드 ‘박카스’를 통해 이름의 철학을 실현했다. 일양약품은 ‘한결같이 밝은 빛’을 뜻하며, 태양처럼 변함없이 국민 건강을 비춘다는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유유제약은 창립자 유특한의 성씨와 ‘유익하다’의 유를 결합해 ‘국민에게 유익한 약’이라는 뜻을 완성했다. 이름 하나에도 사회적 책임 의식이 스며 있던 시대였다.
1960년대 이후에는 철학이 중심이 되는 이름이 늘어났다.
녹십자는 생명을 의미하는 녹색과 인류의 피를 상징하는 십자를 결합했다. 생명을 살리는 의학이라는 사명을 상징하며 국가 백신 산업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후 브랜드 정체성을 세계 시장에 맞게 확장하기 위해 ‘GC(Green Cross)’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했다.
한미약품은 ‘한국과 미국이 함께 간다’는 뜻을 담아 국산 기술로 세계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이름으로 표현했다. 이는 ‘수입 기술 종속’을 벗어나기 위한 독립 의지로 이후 한미약품은 이름 그대로 국내 기술 기반의 신약 개발로 글로벌 시장 진출에 성공했다. 대웅제약은 ‘크게 성장하는 곰의 기상’을 뜻해 인내와 강인함을 상징한다. 이후 지속적인 연구개발로 성장해 이름의 의미를 실현한 대표 기업으로 평가된다.
태극제약은 ‘대한민국의 상징’을 이름으로 사용했다. 이를 통해 국산 의약품 자부심을 강조하고, 당시 해외 수입 의약품 중심 시장에서 자립의 의지를 드러냈다. 삼일제약은 ‘신뢰·정직·협력’이라는 세 가지 경영 이념을 이름에 직접 담았다. 철학이 곧 브랜드가 되고, 브랜드가 기업의 정신을 대변하던 시기였다.
중외제약은 ‘우리나라 중심에서 세계로’라는 뜻의 중외를 사용했다. 2000년대 이후 JW 브랜드를 결합하며 글로벌 정체성을 강화했다. 광동제약의 이름에는 동양의 의학적 전통이 깃들어 있다. ‘광명한 물’이라는 의미는 한방의 지혜와 현대 의학의 융합을 상징했다. 이후 비타500과 광동수 등으로 ‘건강의 근원’을 상징하게 됐다.
동국제약은 ‘국산 제약 기술의 자부심’을 강조한 이름이다. 국내 기술력을 바탕으로 의약 자주화를 이루겠다는 창업 정신이 담겼다. 삼천당제약은 본사가 있던 하남 삼천동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해 ‘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기업’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제약의 이름이 지역사회와의 연대의 상징으로 쓰이던 시기였다. 대원제약은 ‘큰 으뜸’이란 뜻으로, ‘제약업계의 중심이 되겠다’는 기업적 포부를 반영했다.
2000년대 이후 제약 네이밍은 급격히 달라졌다. 글로벌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이름은 기술력과 혁신을 상징하는 언어로 변했다.
셀트리온은 세포를 뜻하는 셀과 전도자를 뜻하는 일렉트론의 합성어로, 생명과학의 신호를 전달하는 기업이라는 비전을 담았다. 메디톡스는 의학을 뜻하는 메디컬과 독소를 뜻하는 톡신의 결합으로, 보툴리눔 톡신 기술을 기반으로 한 기업의 정체성을 이름으로 표현했다. 휴젤은 인간과 젤의 합성어로, 인체 친화적 바이오 소재를 연구하는 기업의 철학을 담았고, 에이치엘비는 인간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겠다는 의미의 ‘Human Life Better’를 약자로 썼다. 한올바이오파마는 순우리말 ‘한울’을 변형해 하늘처럼 넓은 가치와 포용을 뜻하며, 한국적 감성과 글로벌 감각을 함께 담았다. 최근의 지니너스는 유전자와 천재의 합성어로, 유전학 혁신을 이끄는 새로운 세대를 상징한다.
이처럼 한국 제약사의 이름은 단순한 브랜드를 넘어 시대의 언어로 존재해왔다. 창업자의 이름으로 신뢰를 강조하던 시대에서, 철학과 사명을 드러내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혁신과 글로벌 경쟁력을 상징하는 영어식 이름의 시대로 진화했다.
이름의 변화는 곧 산업의 변화이며, 제약이 단순한 의약업을 넘어 생명과학과 바이오테크놀로지로 확장해 온 과정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