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대통령 사이다 발언 부메랑
대통령의 메시지는 늘 분명하되 차분해야 한다. 또 절제되고 품위도 갖출 필요가 있다. 그래야 권위를 갖는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 국정 최고 책임자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전쟁터의 국외자일 수 없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런 자리에 있는 지도자의 발언이라면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대통령 메시지 관리를 위해 비서실에 전담 비서관을 두는 이유다. 제대로 된 대통령실이라면 대통령의 말 한 마디도 정제되지 않고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 말에 과잉 표현이 있으면 국민들은 불편해 한다. 짜증·분노 등 감정이 녹아 있으면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온갖 억측도 난무한다. 순화하지 않은 말은 논란의 대상이다. 시비의 도마에 올라 국정에 불필요한 혼란을 불러온다.
이 대통령은 22일로 취임 80일을 맞는다. 벌써부터 그의 메시지가 거칠어 보인다. 산업 재해와 주식 불공정 거래 관련 이 대통령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하나는 "(포스코이앤씨의 반복된 산재 사고 관련)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 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볼 수 있다"(6월 29일 국무회의)다.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 주식시장에서 장난치다가는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6월 11일 한국거래소 방문)다.
이 대통령의 두 발언은 강렬했다. 전달된 메시지도 명확했다. 산재와 증시 불공정을 뿌리 뽑겠다는 이 대통령의 단호한 의지가 드러났다.
‘미필적 고의 살인’ 발언은 국무회의에서 나왔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산재 사망사고 상습 발생 기업에 대해 “여러 차례 공시해서 주가가 폭락하게”란 얘기도 했다. ‘사업 면허 취소’, ‘징벌적 손해배상’, ‘금융 대출 제한’ 등 실질적으로 경제적 불이익을 주는 방안 마련까지 직접 지시했다.
여기엔 ‘산재 공화국’ 불명예를 벗어나지 않고는 진짜 선진국으로 우뚝 서기 어렵다는 이 대통령의 절박한 심정이 반영됐을 것이다. 산재는 노동 취약계층의 목숨을 앗아간다. 경제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우리 주변에서 하루가 멀다 하며 벌어졌다.
특히 특정 대기업에서 올해 들어서만 무려 네 차례 중대재해 사고가 났다. 이들 사고로 4명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가자 대통령으로서 단단히 화가 났을 수 있다.
이번 일은 소년공 출신 이 대통령 스스로가 산재의 직접 피해 당사자였다는 점과 오버랩 됐다. 당연히 이 대통령의 발언은 대중에 호소력 있는 말로 다가올 수 있었다.
‘패가망신’ 언급은 이 대통령이 취임 여드레 만에 증시를 찾아 한 말이다. 이는 이 대통령이 야당 대표, 대선 후보 시절부터 줄곧 강조해온 증시 활성화 필요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명분도 뚜렷했다. 선량한 대다수 투자자들은 증시에서 도둑을 맞지 않도록 하는 것에 열광할 수밖에 없다. 주식 불공정 거래는 경제를 좀 먹게 한다. 청년들의 꿈을 짓밟고 그들을 허탈하게 하는 병폐다.
대통령 취임 첫날 코스피가 2.6% 오르며 증시에서 축포를 쐈다. 해당 언급은 그런 사정도 이 대통령을 더욱 고무하게 한 것 아닐까.
코스피가 그 뒤로도 상승세를 이어가더니 6월 20일 3000선을 뚫었다. 이 대통령으로선 증시의 이같은 호응으로 임기 초반 국정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을 수 있다.
그에 때 맞춰 주주 충실 의무를 규정한 상법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지난달 3일 국회를 통과했다. 증시의 투명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법안은 이 대통령의 공약이자 1호 법안이다. 지난달 14일엔 3200선을 3년 5개월 만에 회복했다.
집권 더불어민주당이 최근 2차 상법 개정안 처리를 추진 중이다. 상승세를 탄 증시 흐름에 자극받았을 게 뻔하다. 2차 상법 개정안은 ‘더 센’ 법안으로 통한다.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등을 담았다.
이재명 정부 시대의 주가 오름세가 반드시 이 대통령의 경제 공약·정책 덕분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의 경제 비전에 대한 기대감이 적잖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대통령은 코스피 5000시대를 비롯해 경제 잠재 성장률 3%, 인공지능(AI) 3대 강국, 국력 세계 5강 등 경제 비전을 제시했다.
이재명 정부는 임기 초반 증시 호조에 대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코리아 프리미엄’으로 만드는 첫 걸음이라고 자평했다.
주식 불공정 거래의 엄단 방침은 전임 윤석열 전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주가조작 의혹 수사와 맞물려 더욱 주목받았다.
사이다 발언은 한 여름 폭염 무더위를 식힐 정도의 시원한 청량감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치면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법이다.
산재 관련 이 대통령의 엄포와 지시는 정부의 구체적이고 강도 높은 후속 조치들로 이어졌다. 그런데도 중대 재해 발생은 그치기는커녕 줄지 않고 계속됐다. 이 대통령은 “모든 사망사고 직보”(8월 9일)를 지시했다. “산재 사망은 사회적 타살”(8월 12일 국무회의)이란 말도 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그 사이 대통령의 메시지는 눈길을 끌 만한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뭐라고 말하든 곧이곧대로 믿지 않은 양치기 소년의 말쯤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급기야 공기업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사업 현장에서도 사망 사고가 일어났다. 지난 19일 경북 청도군 경부선 철로에서 무궁화 열차에 선로 근로자 7명이 치여 2명이 목숨을 잃고 중상자 4명 포함 5명이 부상한 것이다.
코레일의 감독 부처는 국토교통부이고 국토부는 행정 수반인 대통령의 지휘를 받는다. 민간 대기업 그룹으로 보면 코레일의 부회장은 국토부 장관이고 회장은 대통령인 셈이다.
현행 중대재해처벌법은 사망사고 등 중대재해 발생 때 ‘실질적으로 지배ㆍ운영ㆍ관리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의 사업주 또는 경영 책임자 등을 처벌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과연 이 대통령이 이번 코레일 사고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 대통령은 잇단 사망사고에 대해 불과 한 달 사이 최소 두 세 차례에 걸쳐 공개적으로 강하게 질타했다. 그 화살이 본인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이 대통령이 이런 상황을 미리 내다봤다면 적어도 좀 더 자중하지 않았을까.
이번 철로 사고는 이 대통령 인사에도 먹칠을 했다. 34년 열차 기관사 출신을 고용노동부 장관에 기용했는데 이 엄중한 시기에 그 장관의 친정 쪽에서 중대재해 사고가 났다.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유구무언일 것이다.
이 대통령이 국무회의 TV 생중계 중 특정 기업을 콕 찍어 엄포를 놓은 것을 놓고도 말이 많다. 조직폭력배를 다룬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 벌어졌다고 수군댄다. 한 놈만 두들겨 패 주눅 들게 했다는 것이다. 수차례 사망사고를 낸 기업의 그룹 회장이 대통령의 괘씸죄에 걸렸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해당 기업이 여러 차례 중대재해 사고를 일으켰으니 사회적 지탄과 함께 합당한 제재를 받는 건 마땅하다. 그렇더라도 대통령의 언행에선 절제가 필요했다.
사고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고인과 그 유가족에 대한 위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에 못지않게 국가 최고 권력자가 민간기업의 운명을 섣불리 거론하는 것에도 신중했어야 했다. 민간기업은 브랜드를 자산으로 삼아 사업을 영위하는 조직이다. 아무리 권력자라도 자유 시장 경제를 하는 곳에서 기업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비록 사고의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기업이라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해당 기업은 시공능력평가 7위 대형 건설사다. 이 회사가 문을 닫으면 그 파장이 실로 작지 않다. 대통령이 검토를 주문한 ‘면허취소’ 여부는 당장 이 회사의 직·간접 고용 직원 약 2만3000명에 그 가족들까지 합치면 5만여 명의 생계가 달린 문제다. 이 기업의 건설사업 현장이 수도권 등 전국 103곳에 이른다.
이 현장들이 잇단 사고 직후 안전 점검을 이유로 올스톱했다. 다행히 21일 일부 현장의 공사를 재개했지만 이미 공사 차질로 인해 적지 않은 손해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택건설 현장이라면 애꿎은 계약자들의 피해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사고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과 제재 방안까지 제시하며 검토를 지시한 것도 부적절했다.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 노동 전문가인 고용부 장관을 단번에 허수아비로 만드는 처신이었다.
이 대통령의 ‘기업 때리기’가 본격화한 시점은 지난달 25일이다. 그날 이 대통령은 경기 시흥 SPC삼립 시화공장을 찾아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간담회를 가졌다. 이 대통령은 이 간담회에서 허영인 SPC 회장, 김범수 SPC삼립 대표 등을 앞에 앉혀놓고 속사포 질문들을 쏟아냈다. 경영진을 향해 “모르면 모른다고 하라”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이 대통령의 이런 광경들은 낯설지 않다. 이 대통령은 경기도지사 시절인 2020년 2월 24일 코로나19 관련 조사를 거부한 신천지 교인에 대해 경찰이나 공무원들이 강제로 체포할 수 있도록 하는 치침을 내렸다.
그 이튿날 관내인 과천 신천지 총회본부를 직접 방문, 신도 명단을 제출 요구했고 결국 확보했다. 신천지에 코로나19 복수 확진자가 발생, 수도권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 대통령은 당시 ‘지금은 전쟁 상황’, ‘군사 작전에 준하는 방역’ 등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 장면은 TV를 통해 생중계돼 화제를 모았다. 이를 본 사람들은 “일 추진력 뛰어나다”는 찬사와 함께 “월권이나 직권을 남용해 행정지시를 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받았다.
‘패가망신’ 표현을 써가며 주식 불공정 거래를 막겠다고 한 이 대통령의 다짐도 빛이 바랬다. 퇴색의 수준을 넘어 이 대통령 자신을 찌르는 창으로 돌아왔다.
이춘석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지난 4일 본회의 중 주식 차명 거래 의혹 사건으로 낙마했다. 4선인 이춘석 의원은 당초 법사위원장으로서 이재명 정부의 임기 초반 산적한 개혁 입법 추진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떠맡았다. 또 정권 인수위원회 역할을 한 국정기획위원회에서 경제2분과장으로서 이 대통령 임기 5년의 국정 밑그림을 그리는 소임도 부여받았다.
국정기획위 경제2분과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등의 정책을 담당했다.
그런 그가 이재명 정부의 인공지능(AI) 육성 정책의 수혜주로 꼽히는 기업 주식을 자신의 보좌관 명의로 거래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차명거래는 주식시장을 어지럽히는 불법으로 간주된다. 그것만으로도 이 대통령이 말한 ‘패가망신’의 대상이다.
그 뿐이 아니다. 국정위의 정책 수혜기업 소관 분과장으로서 이해충돌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정권의 도덕성 등에도 큰 상처를 냈다. 이 의원은 곧바로 법사위원장직을 사퇴했다. 민주당은 그를 당적 제명했고 이 대통령은 국정위 분과장에서 해촉했다.
얼마 전까지도 강세를 나타내며 코스피 5000을 향해 순항하는 것처럼 보였던 주식시장이 더 이상 상승의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고공행진하던 대통령 지지율도 하락 추세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60대 중·후반을 찍다가 50%대 초·중반으로 주저앉았다. 이 결과들은 ‘이춘석 게이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대통령의 말은 정치적 목적에서 고도로 계산된 메시지일 수 있다. 이를 관전자 입장에서 보면 이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 체질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참모들도 국정 아마추어로 비춰진다.
야당 지도자는 통상 정권과 맞서 비판과 견제에 익숙하다. 정책보다는 자극적이고 인기영합(포퓰리즘)적인 언행으로 지지세를 결집하거나 확장한다.
하지만 이제 이 대통령이 달라져야 한다. 행정 책임자가 사사건건 사법당국의 범죄 소탕하듯이 해서는 안 된다. 공적을 표적 삼아 대중의 분풀이 심리에 편승, 과잉 언행을 하는 것도 금물이다.
호통·질타·엄포 등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한바탕 소동만 일으킨 뒤 뒤탈이 나게 할 뿐이다.
시끄러운 세상에 은인자중의 국정을 펼치는 대통령 모습을 보고 싶다. 그 시작은 요란한 쇼맨십에 기대지 않고 무리수를 두지 않으며 차분하게 민생을 챙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