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1거래소-1은행’ 폐지론… 규제완화인가, 독점심화인가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모두 대선을 앞두고 ‘가상자산 1거래소 1은행’ 원칙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자금세탁 방지를 위해 도입된 규제를 없애고 자율 경쟁을 유도하겠다는 취지지만, 정작 시장은 일부 대형 거래소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다.
16일 가상자산 통계 사이트 코인게코에 따르면 국내 주요 거래소의 24시간 거래량 점유율은 업비트 67.5%, 빗썸 29.3%, 코인원 2.4%, 코빗 0.6%, 고팍스 0.05% 순이다. 이미 두 거래소가 시장을 장악한 독과점 구조에서 규제를 푸는 것이 자유 경쟁이 아닌, ‘승자 독식’을 더욱 굳히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독과점은 기업 규모에서도 확인된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 결과에 따르면, 업비트 운영사인 두나무는 재계서열 36위로 상호출자제한집단에, 빗썸은 90위로 공시대상기업집단에 신규 지정됐다. 가상자산 시장이 이미 대기업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규제 완화가 과연 공정한 경쟁으로 이어질지 의문이다.
시장 규모는 상당하다. 가상자산 보유금액은 지난해 10월 58조원에서 12월 104조원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났고, 국내 투자자 수도 1825만명에 달한다. 빗썸의 경우 지난해 말 기준 고객 예치금만 전년 대비 163.3% 증가한 2조2630억원에 이른다.
실제로 거래소와의 제휴가 은행에 실질적인 이익으로 이어졌다는 점은 KB국민은행의 사례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빗썸과의 실명계좌 제휴 이후, KB국민은행은 3개월 만에 약 50만 명의 고객을 확보했고, 요구불 예금은 약 6조원 가까이 증가했다. 이는 금리 하락기에 수신 잔액이 줄어들고 있는 다른 시중은행들과는 상반된 흐름으로, 은행 입장에서는 거래소와의 제휴가 단순한 마케팅을 넘어선 전략적 자산 유치 수단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우리은행이 ‘1거래소-다자은행’ 체제를 제안한 점은 의미심장하다. 업비트와 제휴한 케이뱅크는 우리은행이 지분 12%를 보유한 주요 주주다. 오는 10월 업비트와의 제휴가 종료될 경우 케이뱅크의 가치 하락이 불가피해질 수 있어, 우리은행 입장에서는 다자 제휴를 통해 자산 가치를 방어하려는 전략적 행보로 볼 수 있다.
금융당국은 여전히 신중한 입장이다. 금융위원회는 12일 공식 입장을 통해 “시장 독과점과 자금세탁 위험 등 우려를 감안해 신중하게 검토 중이며, 구체적인 방안은 정해진 바 없다”고 밝혔다. 자금세탁 방지라는 제도의 근본 취지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입장이다. 거래소마다 다른 은행을 통하면 자금 흐름 추적이 어려워지는 만큼, 제도 전환에 따른 리스크 역시 분명하다.
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1거래소-1은행 체제는 초기 거래소들이 내부통제를 갖추지 못했던 시절, 은행을 통해 자금세탁 위험을 통제하기 위한 안전장치였다”며 “다자 제휴가 허용되면 입금과 출금이 서로 다른 은행을 통해 이뤄질 수 있어, 모니터링이 분산돼 자금 흐름을 추적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도 “글로벌 기준에서 이런 규제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사례로, 시장 성숙도를 감안하면 제도 재검토는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또한, 이 논의에서 간과해선 안 될 점은 한국 가상자산 시장의 특수성이다. 국내 가상자산 시장은 여전히 투기적 성향이 강하다. 또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려는 경향이 강한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형성된 규제는 단순히 외국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 ‘1거래소-1은행’ 규제가 외국에는 없다고 해서, 우리에게도 맞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다.
결국 중요한 건 규제를 없앨지 유지할지가 아니다. 어떤 방향이 시장을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가의 문제다. 다자 제휴가 허용된다면 자금 흐름에 대한 모니터링 체계는 더 정교하게 설계돼야 한다. 거래소 내부 통제도 지금보다 더 엄격해져야 한다.
무엇보다 시장 집중에 따른 불균형을 줄이기 위한 정책적 고려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독과점이 고착화된 상황에서 중소 거래소들이 배제되지 않도록 균형 장치가 마련될 필요가 있다.